괴나리봇짐 진 선비들이 가장 좋아했던 길 문경새재
엽전 열다 냥 꼬깃꼬깃 옷섶에 챙겨 받은 선비는 달랑 괴나리봇짐 하나 메고 한양으로 과거 보러 천 리 길을 떠난다.
어사화(御賜花)를 쓰고 금의환향할 낭군님을 떠나보내는 아내는 몇 달이나 걸릴지 모를 급제와 재회를 손꼽아 기다리며 정화수 앞에서 천 번 만 번 빌고 빈다.
‘선비의 길’로 상징되는 조선의 옛길 문경새재는 선비들의 갖은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누구는 웃었고 누구는 한탄했다. 달성 현풍에 살던 광주(1569~1617년)는 상주를 지나 새재로 가면서 금세 노자(路資)가 떨어졌다. 그는 줄곧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양식이 부족해 유산으로부터 빌린 쌀을 서 말 아홉대로 꾸어가니 너 말 주소.”
떠나보내는 부모와 가난하고 어진 아내는 ‘모험’을 건다. 옛날에는 한집에 자식이 여럿 있어도 형편이 넉넉하지 못하면 주로 장남에게 집중적으로 지원해 과거에 응시하도록 했다.
한양으로 한 번 떠나보낼 때면 논밭을 팔아야 경비를 댈 수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 보면 일종의 ‘로또’에 희망을 건 셈이다. 가난한 선비가 낙제하면 파산에 가까운 생활을 해야 했다.
선산의 노상추(1746~1829년)도 여러 차례 한양길에 오르느라 가산이 바닥난 선비였다. 후에 급제해 조금이나마 보상받았지만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는 온 가족이 고통을 감수해야 했다.
문경새재는 동래(부산)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데다 문경을 거쳐 가면 장원급제가 눈앞에 보인다고 믿었기에 각지에서 선비들이 몰렸다. 그래서 ‘장원급제의 길’이라고도 불렸다.
문경은 “경사스러운(慶) 소식을 들을 수 있다(聞).” 해서 장원급제를 바라는 선비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넘었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가 죽령을 넘으면 죽을 쑤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 하는 말도 있으니 문경새재를 가장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멀리 있
는 호남의 선비도 일부러 이곳을 찾아와 넘었을까.
조선 중기 이후에는 군사적 요충지라 산적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길이기도 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나라에서 영남대로(한양~동래)로 개척한 길 중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연결하는 고갯길이다. 영남대로는 지금으로 치자면 경부고속도로 격이다.
동래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짧은 직선대로로 거리는 약 380km다. 당시 선비들이 걸어가면 15일이 걸렸다. 대구에서는 10일, 안동에서는 7일 정도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영남의 선비가 그렇게 먼 길을 걸어가 치렀던 과거 합격률은 13%다. 지방치고는 그나마 많은 편이었다. 한양 출신은 합격률이 45.9%로 거의 절반을 차지했다.
지역별 인구에 비례해 합격자가 안배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과거급제의 길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한양에 도착해도 갑자기 시험 일정이 연기될 때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가난한 선비 중에는 돈이 떨어져 되돌아가는 사람도 생기고, 데리고 가던 머슴을 되돌려 보내기도 했다. 어떤 선비는 도중에 경비를 빌려 훗날 되갚기로 하고 한양으로 향하기도 했다.
이렇듯 청운의 꿈을 가진 선비 10명 중 1명만이 금의환향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거에서 낙방한 사람들의 귀향길 심정은 어땠을까? 유우 잠(1575~1635년)은 이 심정을 시로 표현했다.
“지난해 새재에서 비를 만나 묵었더니, 올해는 새재에서 비를 만나 지나갔네. 해마다 여름비 해마다 과객 신세, 필경엔 허황한 명성으로 무엇을 이룰 수 있을까.”라며
여러 번 과거 길에 올랐으나 급제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낙방했지만 선비의 자존심을 지킨 사람도 있었다.
박득녕(1808~1886년)은 “선비가 비록 과거에 낙방했다 하더라도 슬픈 마음이야 가질 수 없지 아니한가.”라고 말했다.
이처럼 한양 가는 길 중에서 가장 험한 소백산맥을 넘는 문경새재에는 영남 선비들의 애환이 서려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심 넘친 주막에서의 하룻밤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선비 학자들은 모두 이 고개를 넘었다. 누구는 과거길, 누구는 유배길로 그 목적도 다양했다.
그리고 고개 시심 넘친 주막에서의 하룻밤
조선에서 내로라하는 선비 학자들은 모두 이 고개를 넘었다. 누구는 과거길, 누구는 유배길로 그 목적도 다양했다.
그리고 고개를 넘으며 멋진 시 한 수를 남겼다. 조선시대 문인 김시습이 넘었고, 율곡 이이도 넘었다. 퇴계 이황, 서애 류성룡, 서포 김만중도 넘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도 유배길에 이곳 주막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선비의 정취를 남겼다. 그리고 이름조차 모를 수많은 선비가 애환을 뿌리며 이 고개를 넘었다.
'험한 길 벗어나니 해가 기우는데 산자락 주점은 길조차 가물가물 산새는 바람 피해 숲으로 찾아들고 아이는 눈 밟으며 나무 지고 돌아간다
야윈 말은 구유에서 마른 풀 씹고 피곤한 몸종은 차가운 옷 다린다는 잠 못 드는 긴 밤 적막도 깊은데 싸늘한 달빛만 사립짝에 얼비치네'
- 새재에서 묵다(宿鳥領, 숙조령), 이이
오늘날 디지털 시대에서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도 오늘만큼은 이 길을 걸으며 선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 시간을 거슬러 조선의 선비가 되어보는 것이다.
이 순간 모든 생각과 자세를 ‘선비풍’으로 전환해 이이를 따라가고, 이황을 따라가 본다. 가슴을 활짝 열고 폼 나게 걸어본다. 지금은 조선시대다.
길은 쉽다. 운동화만 신어도 좋다. 괴나리봇짐 대신 물 한 병 담은 작은 가방을 둘러메고 가보자. 노폭 5m 안팎의 흙길로 아름다운 계곡과 기암괴석이 함께한다.
충청도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제3 관문)까지는 6.5km다. 제1 관문에서 제2 관문까지 1시간, 제2 관문에서 제3 관문까지 1시간이 걸린다.
왕복 4시간 동안 맑은 공기와 함께 운동이 절로 된다. 올라갈수록 길은 조금씩 경사지고 좁아져 더 매력 있다.
가는 길 중간에 주막이 보인다. 조선의 선비들이 하룻밤 묵으며 시를 읊었던 곳이다. 앙칼진 목소리의 주모가 주안상을 들고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반길 듯하다.
나그네의 숙소인 조령원터, 사찰(혜국사), 경상도 관찰사 임무 교대 소인 교귀정, 아름다운 소(沼), 낙동강 3대 발원지 중 한 곳 등이 있으니 지루할 겨를이 없다
나는 새도 넘기 힘든 조령 관문
‘문경새재’ 하면 무엇보다 조령관 문이 떠오른다. 관문은 출발점에 있는 제1 관문(주흘관), 중간 지점의 제2 관문(조곡관), 정상의 제3 관문(조령관)이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칠 이 천하의 요새를 두고 신립(1546~1592년) 장군이 부하 장수의 말을 무시하고 충주 탄금대로 후퇴하는 바람에 왜군은 한양까지 직행하게 되는데,
관문은 이 불행한 역사 속에서 탄생했다. 이 사건을 반면교사 삼아 임진왜란 후 1594년에 성벽 구축을 위해 제2 관문을 먼저 건립했고, 제1 관문과 제3 관문은 1708년 숙종 때 지었다.
위엄 있는 관문의 모습이 든든해 보인다. 이 협곡에서 왜군을 막았더라면 임진왜란의 전황을 바꿔놓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문경새재』는 조선 태종 14년(1414년) 개통된 관도 벼슬길로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영남대로 중 가장 유명하며 조선시대 옛길을 대표한다.
에는 ‘초점(草岾)’으로, 에는 ‘조령(鳥嶺)’으로 기록된 길로 조선시대 영남 도로에서 충청도(한강 유역)와 경상도(낙동강 유역)를
가르는 백두대간을 넘는 주도로의 역할을 했다.
문경새재는 제1 관문 주흘관, 제2 관문 조곡관, 제3 관문 조령관 등 3개의 관문과 원(院) 터 등 주요 관 방사설과 정자와 주막터, 서낭당과 각종 비석 등이 옛길을 따라 잘 남아 있고,
경상도 선비들의 과거 길로서 수많은 설화가 내려오고 있는 등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큰 옛길이다.
주흘산, 조령산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식생 경관과 옛길 주변의 계곡과 폭포, 숲길 등 경관 가치가 뛰어나며, ‘옛길 걷기 체험“, ”과거길 재현“ 등 옛길과 관련한 다양한 체험 행사가
매년 개최되고 있어 현대인들이 조선시대 옛길 문화 및 선비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훌륭한 옛길 자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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